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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 : 서양고전의 동양적 재해석

by 그자나 2021. 7. 28.

란-포스터
출처 위키피디아

1. 들어가며

란은 일본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전설적인 감독인 구로사와 아키라의 대작이자 명작 중 하나입니다. 서양 고전 중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백미라고 일컬어지는 리어왕을 일본식으로 각색한 영화입니다. (이렇게 구로사와 아키라의 서양 고전을 각색한 영화 중에는 역시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를 각색한 거미집의 성이 있습니다)셰익스피어의 리어왕과 다른 점을 꼽자면 리어왕에서는 세 딸이 등장하지만 란에서는 모두 성별이 바뀐 아들이 등장합니다. 아들로 각색된 부분은 일본의 우화 중 하나인 모리 모토나리의 세 개의 화살 이야기도 영화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5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의상상을 수상했고, 감독상, 촬영상, 미술상 후보작에 오른 굉장한 역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상상을 수상한 만큼 독특한 미술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미술과 의상을 맡은 와다 에미의 미학을 엿볼 수 있으며, 극 중 히데토라의 문장으로 표현되는 해와 달의 문양디자인은 영화의 감독인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글자를 분해하여 상형화한 것이라고 합니다. 영화 미장센에 큰 역할을 차지하는 색채의 배분과 표현에 있어서도 굉장히 치밀하게 구성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줄거리

일본의 센고쿠 시대를 배경으로 3개 성의 성주인 가문의 당주 히데토라는 사냥 중에 갑작스럽게 아들들에게 유산상속에 대한 발표를 합니다. 이에 효심이 깊은 막내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반박하며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예견이라도 하듯 아버지의 바람대로 되긴커녕 형제간의 혈전이 벌어질 뿐이라고 합니다. 히데토라는 자식에게 망신을 당했다는 생각을 하며 분노하고, 아들과 함께 충직한 신하까지 추방하게 됩니다. 이후는 원작인 리어왕의 이야기와 똑같이 진행됩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유산을 둘러싼 형제간의 싸움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카에데의 비중이 높아지며 결말에 이르러서는 이 모든 것이 가문 전체를 멸망시키려고 했던 복수극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타로와 지로는 욕망에 눈이 멀어 카에데의 속셈을 알아차릴 수 없었습니다. 원작보다 굉장히 잔혹하게 인간의 어두운 욕망과 허무주의에 대한 메시지가 상당히 많이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카에데는 결국 복수에 성공하지만, 그녀 자신도 신하인 쿠로가네의 손에 죽게 되고 맙니다. 영화의 마지막을 살펴보면 역시 허무주의를 표현하고 있는데 아버지의 폐허가 된 성을 지켜보다가 불당에 모셔놓은 불화를 떨어뜨려 버리는 장면으로 마무리됩니다. 부처의 자비조차 이 세상에 닿지 못한다는 메시지를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불화를 통해 표현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3. 리뷰

연극학과를 졸업한 저의 경우에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은 깊이 연구해야 할 과제였습니다. 분량과 스펙터클의 면에서 리어왕을 좋아하거나 같은 이유로 싫어하는 학우들이 많았는데 저 같은 경우에는 비열한 야망꾼 에드먼드의 캐릭터를 굉장히 매력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리어왕을 싫어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란을 처음 접하게 되었을 때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일본이 굉장히 문화적으로 선도하던 시절의 영화이기도 하지만 80년대에 이런 퀄리티의 영화를 제작해내고 연출해낸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쓰이는 색채들은 자칫 촌스러워 보일 수 있는 강렬한 색감이지만 오히려 이런 색의 클리셰를 역으로 잘 활용했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가장 놀라웠던 부분은 마치 란의 이야기가 원작이 없는 일본 고유의 설화인 것처럼 모든 것을 치밀하고 완벽하게 구성해놓았다는 점입니다. 저 역시 영화를 감상하면서 바로 리어왕을 떠올리지 못하고 굉장히 익숙한 스토리라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자기화 능력은 역시 굉장히 앞서 나갔던 것 같습니다. 지금의 일본은 과거와는 매우 다른 행태를 보이고 있지만 언젠가 이런 역작이 나오길 바라봅니다. 일본이 아닌 우리나라라면 더 좋겠습니다. 우리나라의 설화로 표현된 서구의 고전은 어떤 모습일지 기대만 해도 벌써 설레옵니다. 그날이 빨리 오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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